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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업 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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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색 및 발견 시기

1225년(남송 보경 원년)

  취엔저우시박제거(泉州市舶司提舉) 조여괄(趙汝適)이 저작《제번지 (諸蕃志)》에 의하면, “류구국은 전주 동쪽에 있으며... 토인들은 황란과 토금을 생산하여 삼섬으로 팔았다.” 라는 기록이 보이고, 이를 통해 당시 대만의 원주민은 이미 사금을 발견했고, 금으로 거래할 수 있다는 사실이 기록되었습니다.

1684년 (청나라 강희 23년)

  주로 지사 기기광(季麒光)이 저서한 《대만 잡기(臺灣雜記)》에 의하면, "금산은 지룽 삼조강의 뒷산이며, 금을 생산하고 있다. 그 중에서 주먹만큼 큰 금도 있고 처만큼 긴 금도 있다…" 이 기록을 통해 지룽산 인근 지역에서 사는 원주민들이 금을 줍거나 금광을 발견한다는 소문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되었습니다.

1890년 (청나라 광서 16년)

  한 광둥 출신이신 철도노동자가 미국 서부에서 철도공사를 참여했을 때 금을 발견한다는 것을 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칠두(七堵) 구간의 철교 설치공사에서 도시락을 세척하다가 지룽허에서 사금을 발견하여 골드러시 열풍을 일으켰습니다. 이듬해 지룽허에는 벌써 3천여 명의 금채굴가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정식 채굴기

1892년(광서 18년)

  민간 금광 분쟁을 억제하기 위해 청나라 조정은 지룽에 금사 총국을 설립하고 루이팡(瑞芳), 스자오팅(四腳亭), 놘놘(暖暖), 치두(七堵), 쉐이판자오(水返腳) 등과 같은 하위 부서를 설립하여 정부에서 직접 도금을 관리하기 시작했습니다. 대중들은 세금을 내고 면허를 받아야만 사금을 채취할 수 있습니다.

1893년 (청나라 광서 19년)

  5명의 신사와 상인으로 구성된 ‘진바오취엔(金寶泉)’ 금사국의 위탁을 받아 1년 6개월 동안 민간에서 시범 운영이 이뤄졌습니다. 이듬해 6월 진바오취엔의 계약기간이 만료됨에 따라 20만 위안이 넘는 수익을 안고 떠났고 금사국은 다시 정부에서 운영을 재개했습니다. 그러나 계약기간 중 금 광부인 이씨 가족이 따추컹(大粗坑)의 개울에 따라 지우펀 산에 오르면서 ‘샤오진과(小金瓜)’ 광맥을 발견하여 지우펀 지부가 추가로 설립되었습니다.

1894년(청나라 광서20년)

  처음으로 따진과금광이 발견되었으며, 채굴자들은 이곳을 ‘진과스’ 명명했습니다.

1895년 (청나라 광서 21년, 일본 메이지 28년)

  진바오취안의 계약이 만료됨에 따라 정부는 광업권을 되찾기를 원했지만, 일본과의 청일전쟁에서 패하여 대만은 일본에 넘겨졌고, 이후 일본은 청나라의 운영 기관과 유사한 사금서를 설립하였습니다.

 

채굴 전성기

1896년(일본 메이지 29년)

  총독부는 금 채굴 금지 명령을 내린 후, 《대만 광업 규칙》을 발표하여 지룽산(基隆山)을 경계로 삼아 삼아 동서로 나눠 두 개의 광산 지역을 정했습니다. 동쪽은 ‘진과스 광산’으로, 광산 권한은 타나카 쵸베에(田中長兵衛)가 이끄는 타나카 그룹(田中組)에게 부여되었고, 서쪽은 ‘루이팡 광산(지금의 지우펀)’로, 광산 권한은 후지타 덴자부로(藤田傳三郎)의 후지타 회사(藤田合名會社)에게 부여되었습니다.

1897년 (일본 메이지 30년)

  타나카 그룹과 후지타 회사가 광산 개발에 착수했습니다.

1904년(일본 메이지 37년)

  본산 광맥에서 희귀한 황비동광을 발견하였으며, 이후 풍부한 구리를 보유한 창런 광맥(長仁礦床)을 발견하였습니다. 이로써 진과스는 ‘금은동광산’으로 변모하였습니다.

1914년(일본 다이쇼 3년)

  풍부한 생산량으로 인해 대만은 일본 제국의 관할 하에 있는 가장 큰 금 생산 지역으로 부상했습니다. 같은 해 지룽인 옌윈년(顏雲年)은 루이팡 광구에서 후지타 그룹의 소유 광권을 임대하고 점차적으로 인근 지역의 광권을 인수하여 지우펀을 장악했습니다.

1920년(일본 다이쇼 9년)

  옌윈년(顏雲年)은 타이양광업주식회사(臺陽鑛業株式會社)를 설립하여 지우펀의 루이팡 금광 외에도 핑시(平溪), 허우통 탄광(猴硐煤礦)이 산하에 있어 금과 석탄을 동시에 장악한 대기업이 되었습니다.

1925년 (일본 다이쇼 14년)

  1차 세계대전의 영향을 받아 진과스 광산 개발권은 우시로쿠 신타로(後宮信太郞)의 진과스광산주식회사(金瓜石礦山株式會社)에게 넘어갔습니다.

1933년 (일본 쇼와 8년)

  일본 광업 주식회사(日本鑛業株式會社)는 진과스 광산을 인수하여 대만광업주식회사(臺灣礦業株式會社)를 설립하고, 대대적으로 설비를 개선하였습니다. 또한 바다에 근접한 쉐이난동(水湳洞)에 신식 부선광장 (현 쉐이난동 제련공장 옛 터)을 건설하고, 쉐이난동에서 빠또우즈(八斗子) 까지 직통하는 간편철도 (현 대만 철도인 선아오선[深澳線]의 전신)를 건설함으로써 광업의 전성기에 접어들었습니다.

1938년(일본 쇼와 13년)

  진과스 광산의 연간 생산량은 2.6톤(약 6만 8천9백 냥)을 기록해 '아시아 제1 귀금속 광산'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1942년 (일본 쇼와 17년)

  태평양 전쟁이 터지면서, 진과스는 군수를 위한 구리 광산 채굴 위주로 전환되었습니다. 일본군은 이곳에 전쟁 포로수용소를 설치하였으며, 영연방 동맹국을 위주로 약 500명의 포로에게 구리 광산 채굴을 강요했습니다.

 

채광 말기

1944년 (일본 쇼와19년)

  미군이 점차 대만 제공권을 가지게 되면서 진과스 광산도 전쟁으로 인해 전면 중단되었습니다.

1946년(민국 35년)

  2차 세계대전 후, 초반에는 중화민국 경제부는 대만 금동광산 준비 부를 설립하여 복구, 재개 등의 작업을 계획하였습니다.

1948년 (민국 37년)

  대만금동광무국(臺灣金銅礦務局)이 진과스 광업을 인수하였고, 제련된 황금은 모두 대만 은행에서 공식 가격으로 전액 구매하였습니다. 국공 내전이 터진 후, 황금 생산 비용이 높아지자 다시 구리 광산 채굴을 재개하고 '구리로 금을 보전하는' 비즈니스 모델을 발전해 나아갔습니다.

1955년 (민국 44년)

  대만금동광무국은 대만금속공업주식회사(타이진회사)로 재편돼 구리로 금을 보전하는 전략을 이어 나가면서 지속적으로 구리 생산을 늘렸습니다.

1971년 (민국 60년)

  지우펀에 위치한 루이팡 금광은 고갈되었고 금값 하락으로 인해 타이양 광업은 지우펀의 금 채굴 사업을 종료했습니다.

1978년 (민국 67년)

  진과스의 금동 생산량이 점차 고갈되면서, 타이진회사는 갱도 채굴에서 대규모 노천 채굴로 바꾸려고 시도하였고, 리라오(哩咾)지역에 리러동제련장(禮樂煉銅廠)을 건설하여 해외에서 구리 광사를 수입해 기존의 채굴에서 제련, 가공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1987년 (민국76년)

  사회 경제적 형태의 변화와 국제 금값 하락으로 인해 타이진회사는 장기적인 손실을 견디지 못하고 폐업했습니다. 이에 따라 약 100년의 역사를 갖은 진과스의 금광 채굴도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2002년 (민국 91년)

  문화 보존 의식이 높아지면서, 지우펀도 관광으로 인해 다시 과거의 번영을 회복해 나아갈 때쯤, 타이베이현 (현 신베이 시) 정부는 타이진회사의 폐광과 사무실 등을 정비해 황금박물관 단지로 조성하였습니다.

2004년 (민국93년)

  황금박물관이 공식적으로 개관했으며, 국내 최초의 생태 박물관 단지로서 인근 지역의 힘을 합쳐 진과스 지역의 광산 옛터, 건물 옛터 및 자연환경을 온전히 보존하면서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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